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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숭정처사 채극철
구분 역사인물
내용 조야(朝野)에서 등불밝히던 숭정처사 채극철

글에 깨우침이 많으나 등용을 싫어하고 정사는 집안끼리하는 정사이니 관여하기 싫고 한평생 글을 지어 백성과 벗한 선비 채극철(蔡克哲)의 묘가 靑所面 늑적골에 있다.
그는 본관이 인천(仁川)이며 자는 자기(子畿)이고 호는 송오이다. 이조(李朝) 명종(明宗) 2년 (1547)에 일명 벽서(壁書)의 옥으로 불리우는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림들의 뜻이 크게 꺽이자 등과를 포기하고 문을 닫아맨 다음 시문을 지어 벗들과 나누웠으며 항시 북쪽 조정을 바라보고는 눈하나 곱게 뜨지않고 묵묵하게 세상풍파를 넘나보다가 죽은 선비다.

그를 가르켜 숭정처사(崇禎處士)라 하였는데 그의 글은 고고하였으며 항시 백성의 편에서 눈물도 흘렸으며 출세에 어두운 자에게 사람이 사는 목적을 강론하였으며 대나무도 항시 푸르른 것이 아니고 대나무는 꺽여지면 죽는다는 비유로 날카롭게 정사를 비판하였었다. 이곳 현감(縣監)으로 부임해 오는 벼슬아치도 그에게 문안을 드리고 싶으나 그의 글과 인품이 두려워 가까이 못갔으며 그의 주변사란들은 항시 그를 찾아와서는 심로(心勞)를 풀고 갔으니 그야말로 이조(李朝)의 선비였다.

조정에서 윤원형의 세도로 사람들이 화를 당하면 남의 일로 생각지않고 자기의 일로 생각하여 문안을 다녔고 그로 하여금 정사에 관여하도록 권고가 있으면 풍류로 인심을 묘사하여 고양이는 쥐를 잡아먹을수 있어도 고양이가 비둘기의 날개는 항시 부러워한다. 하며 백성과 관민을 비교하고 비둘기는 날개가 있으므로 어데던갈수 있지만 고양이는 한정된 곳의 독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을 했었다.

그는 고고하게 살다 죽었기에 당대의 유명한 지관(地官)이 이곳에 와서 묘자리를 구해주면서 옥녀단금형(玉女단琴形)의 자리를 지적하며 그이 학문과 학행을 높이 샀었다. 옳은 정치는 백성을 위하는 정치이고 선비를 우대하는 정치는 탈이없으나 상인(商人)을 우대하는 정친느 나라의 등불이 쉬 꺼진다는 것이고 농민을 위한정치는 선비를 우대하는 정치와 비슷하다. 아무리 당당한 권세가 인물도 방안에 들어가면 고적한 것이며 자기를 아는 백성과 통하는 곳이 있으니 형벌을 자주내리는 권세는 오래가지 못한다 하였다.

한 고을의 원(縣監)은 자기 고을을 다스릴 때 칼자루로 다스리지말고 덕행으로 다스려야 하며 자기가 밥상을 대했을 때는 가난한 백성의 밥상을 생각해서 적어도 수저를 서너번 놓아야 덕행있는 원이고 자기가 따뜻한 옷을 걸친 겨울에 내가 어찌 따뜻한 옷을 걸치게 되었는가 하고 백성의 옷을 생각하여야 한다 하였다.

채극철(蔡克哲)의 묘가 있는 늑적골엔 당시만 하여도 산과 들이었다. 지령이가 광주김씨(光州金氏)의 묘자리를 잡으러 와선 그를 따라온 광주김씨(光州金氏) 김장군(金將軍)의 집안과 군종들이 지령(芝靈)을 위협하며 벙구나무 드릅나무를 비벼들면서 좋은 묘자리를 강요 하므로 풍수에 밝은 지령은 속으로 웃으면서 비학절우(飛鶴切羽)의 땅을 골라서 나르는 새가 날개가 짤린 형국(形局)을 골라주며 죽음을 무릅쓰고 명당자리라 한것도 그는 내포(內浦)의 명당자리는 선비가 차지하여야 하므로 한쪽을 가르키며 자꾸 눈속임을 했었다.

다시 김정승의 묘자리를 잡으매 그후에 이토정이 나타나서 이것도 묘자리냐고 개탄하였다니 풍류나 풍수는 힘으로 택해지지 않는 것이 역사적인 실예였다.

지령이 채씨들 문중에 와서 이 곳이 명당이라고 하고 묘자리를 정해주고 훌쩍떠나니 그 곳이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다. 그래서 채극철은 선비임으로 그 자리에 묘를 쓰게 되었다 한다. 그후 청소사람들이 두고두고 아끼는 선비가 되었다 한다. 학문이 깊을수록 인생을 소요한 선비가 채극철(蔡克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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